산 위에서 산 아래서
산위에서 - 계시의 해석의 미숙함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계시적 대답이 있은후 8일만에 주님은 변화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신다.(눅9:28) 세명의 제자중의 드림팀을 대동하시고 오르신다. 기도하실때 주님의 용모는 변화되었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의 예언적인 큰 두 증인이 나타난다. 주님의 죽음을 증거한 모세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증언한 엘리야가 나타난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입박한 상태에서 이 세사람은 주님의 별세할 것에 대하여 대화하셨다. (눅9:31) 하나님의 나라의 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순간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산위, 임재의 영광이 있는 그 산위에 까지 따라갔으면 눈을 부릅뜨고라도 그 임재의 옷자락을 잡아야 하는데 세제자들은 깊이 잠들었다. 그러다가 뭔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제자들이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그 그림자인 두 증의 모습을 본다. 언제나 그렇듯이 베드로가 이 광경을 보고 초막셋을 짓겠다고 흥분하여 말한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그렇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른다. 산위의 영광의 가장 정상에서 우리는 계시의 현존 앞에서도 잠에서 깬지 얼마 안된 상태라면 그 영광의 속뜻을 풀어낼 힘을 상실한다.
지금 엄청난 계시들이 교회안에 풀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영광을 우리가 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을 통해 초막셋을 짓는 것으로 하나님나라가 아닌 '유토피아' 형식의 펜션을 짓는 것으로 마무리할지 모른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림자이고 예수는 실체이다. 그 둘은 그 삶 전체를 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었다. 같은 반열에 놓고 기념관은 짓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름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라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아! 한가지 더! 이런 계시적인 미숙함이 있더라도 산의 정상은 오르라! 그 본래의 뜻과 의미는 주님 알리실테니 실수하는것을 두려워 하지말라! 임재를 갈망하라! 영광을 사모하라!
산아래에서 - 믿음없음
변화산아래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3명의 드림팀을 올라가고 9명의 제자들은 산아래에 남는다. 이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찾아온다. 이 아버지의 소원은 이 산 아래 캠프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기때문이라고 우리는 흔히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꾸지람을 들으면 그것도 아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 제자들은 왜 고치지 못했는가? 예수님께서 출타중이고 변화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없어도 제자들이 이 귀신들린 아들을 능히 고치기를 원하셨던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제자들을 이렇게 심하게 꾸지람 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라가는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없는 것은 믿음이었다. 또 이 믿음이 실체가 되는 기도와 금식이 없었다. 이것은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변화산에 오르실지라도 주님의 가르치신 능력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산 아래에 남아있는 제자들은 주님의 임재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시지 않으면 전혀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것이라 생각한다. 믿음이 큰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나온다. '주님 말씀만 하옵소서 병든 제 하인이 낫겠나이다.' 이런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흥분하신다.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
기도와 금식은 우리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 '너희가 나와 같은 일을 할 것이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아버지께로 감이니라”이 말씀을 믿는가? 난 믿는다. 우리안에 성령님이 계신다.